당을 추스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각종 신당설에 흔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

'박근혜 신당론', '안철수 제3정당 창당설', '박세일 보수신당', '야권통합', '진보통합정당'

2012년은 바야흐로 선거의 해다. 총선과 대선이라는 굵직한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각종 신당 창당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강행 처리의 후폭풍으로 국민들의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면서 일각에서는 기존 정치질서의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미 FTA 비준안을 놓고 지루한 전투를 마친 여야는 쇄신과 통합 등 각자의 방식으로 당을 추스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각종 신당설에 흔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당 창당과 함께 한 대한민국 정치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같은 분석에 더욱 힘이 실린다.

 

◇민주자유당

 

민주자유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제6공화국 당시 창당됐다.

제5공화국 당시 집권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은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계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승리하면서 재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과반수(150석)에 못 미치는 125석을 얻는데 그쳤고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와 군사정권에 대한 거부감에 위협을 느꼈다.

 

이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비밀리에 일명 '보수대연합'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90년 1월22일 민정당 노태우 전 대통령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했고, 같은 해 2월9일 민자당이 새로운 거대 여당으로 탄생했다.

 

같은 해 5월9일 제1차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총재로,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등 3명을 최고위원으로 각각 선출하면서 총재 1인과 대표위원 3인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했다.

 

민자당은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며 재집권했으나, 당 내 계파 간 이해 갈등으로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95년 김종필 전 총재가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6월27일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같은 해 11월과 12월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12월5일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1997년 11월21일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창당됐다.

당시 김영삼 정권이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IMF 사태를 초래하자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회창 후보는 김영삼 정권과의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또 'DJP연합'의 부당성과 '3김정치' 타파를 주장하며 통합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순 후보와 통합한 후 합당에 합의했다.

 

같은 해 11월19일 무한히 큰 나라와 모두가 하나 되는 나라라는 뜻으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정한 후 이틀 뒤 전당대회를 거쳐 정식으로 당 통합을 이뤘다.

하지만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잇따라 패배하면서 한나라당은 야당에 머물렀고 이후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집권 여당이 됐다.

 

◇새정치국민회의

 

새정치국민회의는 1995년 9월5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주도로 창당됐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선에서 패한 뒤 정계를 은퇴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7월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김 전 대통령 계파를 중심으로 민주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모여 창당한 국민회의는 창당과 동시에 국회 원내 의석 53석을 차지해 제1야당이 됐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선에서 승리했고, 1998년 2월25일 김 전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면서 국민회의는 여당이 됐다.

 

하지만 집권 이래 국민의 개혁 욕구를 소화하는 데 실패하고 지역정당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에 따라 2000년 1월20일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한다는 차원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정당 명칭을 바꿨다.

 

새천년민주당은 2002년 12월19일 제16대 대선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리로 집권을 이어갔으나, 2003년 11월11일 당 내 개혁 세력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분당함으로써 다시 야당이 됐다.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에서 당 내 개혁을 요구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 창당한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 출신 40명과 한나라당 출신 5명, 개혁국민정당 출신 2명의 의원을 주축으로 설립됐다.

 

우리당은 2004년 1월11일 임시 전당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이 첫 의장에 당선되고 김근태 의원이 첫 원내대표가 됐다. 당시 우리당의 지지율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3월9일 노 전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으나, 이는 오히려 우리당 지지율 상승에 도움이 되면서 2004년 4월15일 제17대 총선에서 152석을 획득, 1988년 이후 첫 '여대야소'를 이루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같은 해 5월14일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가결안을 기각했고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우리당의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했다.

 

2005년 노 전 대통령과 우리당은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한나라당의 거부로 실패했다.

 

이는 결국 내부 자중지란을 초래하면서 우리당은 2006년 5월31일 지방선거에서 전북 1곳에서만 승리했을 뿐 참패를 당했다.

 

이후 우리당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일부 의원들의 집단 탈당으로 과반이 붕괴됐으며, 같은해 8월20일 우리당 탈당파 주도로 창당된 중도개혁통합신당과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되면서 해체됐다.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3월30일 김종필 전 총재를 중심으로 창당됐다.

 

민자당 내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을 겪던 김 전 총재는 1995년 1월 당 대표위원직을 사임한 뒤 공화계의 동조세력을 이끌고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설립했다.

 

자민련은 같은 해 지방선거에서 충청권 3석을 석권하고 강원도지사를 당선시켰으며, 이듬해 총선에서 50석을 획득하면서 일명 '녹색바람'을 일으켰다. 이후 1997년 11월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DJP 후보단일화'를 통해 공동정권을 창출함으로써 2년 간 공동여당으로서 권력의 한 축을 이뤘다.

 

하지만 2004년 4월15일 총선에서 지역구 4명의 당선자만 내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하면서 김 전 총재가 사임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2006년 1월17일 자민련을 탈당한 심대평 충청남도지사가 국민중심당을 창당하면서 자민련의 영향력은 더욱 위축됐고, 같은 해 4월 한나라당과 통합하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자유선진당

 

자유선진당은 2008년 2월1일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전 대표를 영입한 뒤 이회창 전 대표 주도로 창당됐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이 전 대표는 2007년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국민중심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심대평 대표는 한나라당과는 차별화된 정통 보수정당을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후보를 사퇴하고 이 전 대표와 손을 잡았다. 이 전 대표는 대선에서 당선되지 못했으나 15.1%의 지지를 얻었다.

 

2008년 2월12일 국민중심당을 통합해 17대 국회 원내 제4당의 지위를 얻은 선진당은 이후 18대 총선에서 18석을 확보해 원내 제3당의 지위를 얻었다.

 

비교섭단체에 머문 선진당은 창조한국당과 연합해 '선진과 창조의 모임'이라는 교섭단체를 구성했지만, 이후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의 공천 헌금 사건으로 인해 교섭단체는 와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