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안 마셨으니 더 마실 수가 없다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삼월의 토끼는 앨리스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홍차나 좀 더 마셔.”, “아직 하나도 안 마셨으니까 ‘더’ 마실 수는 없지.” 모자 장수가 말했다. “덜 마실 수가 없다는 말이겠지. 더 마시기는 아주 쉬우니까.” 자… 그렇다면, “하나도 안 마셨으니 더 마실 수가 없다, 더 마시기 쉽다”는 말을 이해하셨나요? ‘자발적 가난’의 저자 <슈마허>는 적게 가진 사람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 하는 현대인의 부에 대한 모습을 앨리스와 토끼의 대화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가난은 말 그대로 집안의 어려움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난은 곧 ‘돈이 없다’라는 뜻으로 쓰게 되었을까?

다양한 사람들의 나침반이 돈과 물질을 향해 있다. 빈곤, 차별, 전쟁, 질병, 환경오염 등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모든 생명을 외면하고 물질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류에게는 돈이 아닌 진짜 재산들이 있다. 신선한 공기, 맑은 물, 마음의 평화, 사랑, 건강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이런 것들이 있다.

우리부모님 세대의 가난은 절대적 빈곤과 가난이 아닌 비교에서 오는 가난함이었다.

우리 세대의 가난은 어떤가. 선택사양적인 자발적 가난이 아니던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얘기 같으면서도 다른 가난이다.

문득, 좋아하는 책조차도 소유로 느껴져 모두 내다 버리셨다는 말씀을 하신 법정스님의’무소유’가 떠오른다. 그리고 얼마 후 법정스님께서 세상을 떠났다. 소유욕에 불탄 현대인을 책망하듯 그는 살아생전, 무소유를 외쳤다. 그의 외침은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 가난해져서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발적 가난이 추구하는 해법이다.

작금 성공이라는 단어를 단 유수의 저작물들이 부의 축적에 주안하고 있다. 정작 성공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곡선 논리의 진모를 지나치기도 한다. 자발적 가난은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소박한 삶을 통해 얻는 존재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은, 단순히 소유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 가난은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의 실천 철학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만 가지는 연습이 자발적 가난이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 사람은 겸허해진다. 즉 자발적 가난은 절대적 빈곤을 넘어선 시대에 비교를 넘어서는 가난함이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용기와 절제가 필요하다.

재물의 소유가 존재의 가벼움으로 변질되는 것에 조심하라는 경고인 것이다. 동시에 욕심, 욕망으로부터의 가난을 요구하고 있다. 행복, 웃음, 절제, 겸손, 여유, 배려, 나눔 등은 자발적 가난이 가져다주는 느낌들이다. 충분한 부자가 아니어도 주어진 선택의 기회를 따라 가난을 소유함으로써 가벼운 영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찰나, 이것 또한 욕심일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당신께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늘 살피십니까? 좀 더 웃습니까? 좀 불편하더라도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가? 가진 게 적어도 여유롭습니까? ‘예’라고 대답하셨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자발적 가난으로 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한편 소통교육전문가인 이창호는 “성공한 사람이란? 갈망을 바라보고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고로 멀티플레이어는 모든 사람으로 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이며, 자신의 약점을 조정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조용한 주장을 한다.